참사람 에세이 69번째 편지

여든 아홉 참사람

글 : 양지영(참사람 독자)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주민센터를 찾았을 때다. 기본 히라가나는 외우고 간 상태여서 이제 본격적으로 회화를 공부한다는 생각에 설렘이 컸다. 교실에 들어서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도 계셨고, 중년의 사람들도 보였다. 그때 칠판에 한자로 시를 쓰는 키가 작은 할머니가 보였다. 스카프를 단정히 두르고 치마를 입은 모습이 한눈에 봐도 멋쟁이였다. 그런데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는 시에 대한 해석을 하시면서 자신이 쓴 시라고 당당하게 소개를 했다. 그렇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봄 학기가 지나갈 즈음 선생님이랑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선생님의 연세는 무려 여든 아홉 살이셨고, 구십이 가까운 나이여서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해방이 되던 그해 가족과 함께 작은 배로 밀항을 해서 한국에 정착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유학생인 부모님 밑에서 일제 강점기 때는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는 중에도 한국어를 잊지 않고 열심히 읽고 쓰면서 공부한 종이는 누가 볼세라 불태우면서까지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선생님은 줄곧 소학교 시절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으로 살지만 언젠가는 내 조국 내 나라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증거로 남기기 위해 공부를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셨던 선생님의 공부 습관은 구십이 다가오는 이 연세에도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셔서 시를 한 수 적으시고 지금도 일본어 공부며, 한국어 공부며, 책을 가까이 한 탓에 기억력이 좋았다. 스무 살이 넘던 해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을 남편으로 맞이했다. 시골에서 선생님은 시어머니와 동서들의 시샘도 많이 받았다. 공부 좀 했다고 유식을 떤다고 왕따도 당하고, 한자로 말하면 시어머니께서는 나를 가르쳐 들라고 한다고 푸념을 주기도 했다. 1950년대의 시골풍경을 떠올리면 그 당시 선생님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선생님이 이토록 총명한 이유는 오랫동안 이어온 공부습관이 아니었을까 생각 든다. 선생님은 지금 주민센터에 자원봉사로 일한다. 선생님의 나눔과 베풂의 철학은 스스로 공부하면서 남에게 자신의 재능을 베푼다는 데 있다. 한동안 자신을 왕따시키던 두 동서를 앉혀놓고 선생님은 어설픈 한국어로 공부를 가르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글을 깨치지 못했던 동서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한 것도 결국 선생님의 끈기 있는 설득과 배려 덕분이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선생님은 다시 무료봉사의 삶이 이어졌다. 제대로 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했다. 자신도 한국어가 서툴렀지만 한국의 사정은 생각보다도 더 열악했다고 한다. 셈을 몰라서 사기를 당하는 이웃도 있었고, 한글을 몰라 군대에 보낸 자식의 편지도 못 읽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오랜 핍박과 다시 이어진 6. 25 전쟁은 나라의 불행도 컸지만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 당시 여성들의 고통도 컸다. 선생님의 경우는 일본의 생활과 한국에서의 생활을 겪으면서 자신이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가끔 우리에게 나이가 들어도 끝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것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한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스스로 알아가며 찾아가는 길은 배우고 또 배우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끝까지 남을 도우며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변화하는데는 교육과 종교가 큰 영향을 준다. 선생님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공부를 통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매사에 감사하고 은혜로운 삶이었다고 말한다. 또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다니며 자원봉사라는 아름다운 베풂을 실천한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일어 재능기부 뿐만 아니라, 한자수업과 시조 수업에도 참가한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선생님이 내 인생의 롤 모델이 되었다. 사람들은 청년 시절에는 많이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스스로 노인이라고 가두어버린다. 물리적인 나이에 갇혀 스스로 배우는 것도 포기하고 자신의 성장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도 나이 들어 아픈데 누구를 도와주냐고 하면서 자신의 삶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도사린다. 선생님을 보면서 참다운 사람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보았다. 요즘 사회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위험한 사람을 구하는 사람은 진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지만 주변에 작은 것을 실천하며 이웃을 걱정하는 의인들도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새벽에 아침을 여는 청소하는 분들도 그러하고, 눈이 쌓일 때 미끄러지는 것을 염려해서 새벽부터 길을 쓰는 배려도 참사람의 행동이다. 또 뺑소니를 봤을 때 적극적으로 경찰에게 연락하고 끝까지 함께하는 이들, 남몰래 아빠와 혼자서는 아이를 위해 반찬을 만들어주는 옆집 아줌마도 참사람의 행동이다. 이런 참사람의 행동들이 우수한 국민을 낳는다.

더 나아가 일어 선생님 역시 지금 이 모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재능기부는 아닐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참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재능기부가 여든아홉 살인 지금까지 말이 아닌 실천으로 행동하는데 있다. 자신을 스스로 일으키며 나이에 붙들리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성장을 통해 나눔 실천하는 사람. 나는 그런 선생님을 통해 내 자신도 스스로 변화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선생님은 비록 전문적인 교사자격증은 없지만 그 어떤 선생님보다 실력이 뒤지거나 모자란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다. 오히려 선생님이 사신 그 시대를 통해 나는 책에서 느껴보지 못한 생생한 역사를 체험하곤 한다. 일제 강점기와 6. 25전쟁을 몸으로 겪으신 선생님. 자신의 모국어를 깨치지 못해 깜깜한 세상에서 빛을 밝혀준 사람. 밤이면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마을 이웃주민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준 사람. 나이가 들더라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배우고 익혀서 자신을 바로 세우라고 말하는 사람. 선생님이 내 품는 열정을 통해 나는 오늘도 선생님에게서 참사람의 기운을 흠뻑 받아 간다. 나 또한 선생님처럼 그렇게 나눔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