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교육재단 소식지「참사람 36.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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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참사람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 : 김정아(참사람 독자)

‘참사람 에세이’은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70번째 편지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 : 김정아(참사람 독자)

 

 

내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불청객인 녀석은 질겼다.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거듭 찾아와 나와 동거를 십 년 동안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세월이었다. 더 이상 항암을 하기에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곳이 S병원이다. “양성자기는 암세포만 골라서 사멸 시킨다”는 정보를 듣고 더 해 볼 것이 없으니 첨단기계의 힘을 의지해보자고 마음먹었지만 나쁜 세포들의 위력에 기가 잔뜩 눌려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잊혀 지지 않는 L선생을 만난 곳이 바로 그 병원이다. 그곳을 처음 갈 때에는 긴 병치레로 체력은 바닥이 나 있고 정신적으로도 지쳐있었다. 그런 나를 잘 이해한다는 듯 치료의 고통과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바꿔준 사람이다. 한 달여 치료 여정 내내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소풍 가는 아이 마냥 즐거웠던 것도 그의 덕분이다.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서서 병원에 도착하면 7시 30분. 환자용 가운으로 갈아입고 대기실에 있으면 그는 VIP 손님을 맞이하듯이 손수 나를 데리러 왔다. 기계 속에 들어가 누우면 잊지 않고 하는 말이 있었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신청하라는 것이다. 내가 선뜻 대답을 못하는 날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잔잔한 클래식이나 숲속에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은 자연을 표현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비록 몸은 무지막지하게 큰 기계 안에 누워 쉽지 않은 인고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지만 눈을 감은 채 음악에 귀 기울이면 여기가 병원이 아니라 한창 좋았던 시절에 가봤던 어느 카페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소요되던 치료시간은 고통이 훨씬 덜 느껴지고 지루할 것 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그 병원에는 의료진들의 건강을 위해서 음식이 잘 나오기로 유명한 구내식당이 있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다 잘 차려진 음식들을 보게 되었다. 그 날은 금식을 하고 CT 촬영을 하고 난 후라서 배가 많이 고팠다. 저절로 발길이 음식냄새가 나는 쪽으로 향했지만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입장이 되지 않았다. 아쉽게 돌아서며 그 안에서 밥 먹는 사람들을 한없이 부러워했었던 적이 있었다. L선생에게 그 일화를 들려주었더니 그런 것은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다면서 자신의 카드로 식당을 통과하게 해 주어 맛있는 밥을 배가 두둑하도록 먹은 적이 있다.

 


지하철 이용할 때와 치료대기 시간의 지루함을 피하기위해 책을 늘 들고 다녔다. 제목이 영어로 된 책이었다. 

“이거 영어책 아니에요?”

“네. 지루함을 덜기 위해 갖고 다니고 있어요.”

“난 영어 글씨만 봐도 졸리던데. 치료 받는 것도 힘든데 책까지 읽다니 대단해요”

그는 이 분야에서는 최고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외였다. 겸손함은 여운을 주며 오랫동안 사람의 가치를 빛나게 하는 힘이 있다. 자신이 이 분야에서 최고라고 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실력자가 아니던가. 우리나라에 몇 대 밖에 없는 양성자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분명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 권위자가 자신의 실력을 우쭐대지 않고 환자의 장점을 찾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칭찬해 줄 때마다 나는 그 말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언행을 더 조심하는 사람으로 어느새 바뀌고 있었다.  

 

한 달여 동안 하던 치료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해야만 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헤어지는 아쉬움과 그 동안의 고마움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나에게 그가 건넨 인사는 친절과는 동떨어진,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내 귀에 와서 닿는 순간엔 진의가 잘 와 닿지 않아 잠시 어리둥절했다.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다시 만난다는 의미는 끝내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래에 어떤 희망도 허락받지 못한다는 상황이 아닌가?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해도 좋다. 아니 그를 만나지 않는 것은 축복이다. 아! 나도 L선생 같은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아름다운 지구에 오래 머물고 싶다. 그래서 남은 세월은 그처럼 따뜻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가 마지막 말에 마법이라도 걸어 내 소원을 이루어 준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마법의 진가가 빛나고 있다. 그건 진정 내 생애 최고의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