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교육재단 소식지「참사람 36.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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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참사람

사랑 실은 마을버스

글 : 진상용(참사람 독자)

‘참사람 에세이’은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73번째 편지
사랑 실은 마을버스

글 : 진상용(참사람 독자)

 

 

위장질환으로 입원 중인 아내가 병원 식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결혼한 지 36년 되도록 주방에 얼씬거린 적이 거의 없으니 이번 기회에 서툰 솜씨로나마 음식들을 만들어 갖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을 마친 다음 갈아입을 속옷과 미리 끓여둔 죽이며 밑반찬들을 챙겨 병원으로 향한다. 집 근처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지하철역과 연계되고 도심을 통과하는 노선인데도 출근 시간대가 아니어선지 복잡하진 않다. 빈자리를 잡은 나는 아침부터 음식 냄새를 풍기면 다른 승객들한테 불쾌감을 줄지도 몰라 보따리를 의자 밑에 밀어 넣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대여섯 살쯤의 아이 손을 잡고, 등에 아기를 업은 엄마가 올라타더니 내 앞자리에 앉는다. 큼지막한 아이들 용품 가방을 챙겨야 하고, 등에서 칭얼거리는 갓난아기를 달래려니 쩔쩔매다가 결국 큰아이는 다른 좌석에 앉혀놓았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도착했고 깔끔한 차림의 할머니가 차에 오른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아이 혼자 있는 자리로 다가가서 아이를 무릎에 척 안는다. 승객이 뜸한 시간대라서 빈자리가 남아 있고 경로석도 비었지만, 하필 어린아이 자리를 빼앗다시피 한 태도를 바라보는 다른 승객들은 별스런 늙은이로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좀 지나서야 나를 비롯한 승객들은 할머니의 속뜻을 헤아리게 됐다. 의자에 앉아 졸음에 겨워 갈래머리를 까딱거리는 아이, 버스가 멈추면 자칫 옆이나 앞으로 쏠려 위험하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아이를 보호해주려고 편한 좌석들 제쳐두고 그 자리로 간 것이었다. 

아이를 무릎에다 앉힌 할머니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럽고 편해 보일 수 없다. 차에 막 올라 아무 경황이 없었을 텐데도 할머닌 어떻게 혼자 있는 아이를 한눈에 발견하였고 돌보려는 보호심이 생겼을까. 아마도 그건 평소 생활에서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적 본능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여러 자식들을 양육한 경험에서 몸에 익었거나, 아니면 지금 당신의 손주들을 거두는 중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고운 심성을 지닌 분의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은 모두 행복하게 자랐으며, 또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얼마 뒤, 할머니가 내릴 눈치였다. 아이를 본래 앉았던 모습대로 남겨놓은 할머니는 못내 안심이 안 되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차에서 내리셨다. 마치 차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나 먼저 내릴 테니 그대들한테 이 아이를 잘 부탁하오.’ 당부하는 것만 같았다. 

반대쪽 좌석에서 내내 지켜본 나는 아이에게로 건너가 할머니가 하던 것처럼 그 아이를 안았다. 오랫동안 집안에 아이들이 없다 보니 몸에 익지 않아서 처음엔 아무래도 어색하고 남들 이목이 신경 쓰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이가 편안해 하는 게 내 몸에 모두 느껴졌다.

얼마 뒤 버스가 병원 앞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이를 어떡해야 되나, 망설이는데 아이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번 정류장에서 내릴 모양이다. 서둘러서 짐을 챙긴 나는 한쪽 팔로 아이를 끌어안고 버스에서 내렸다. 땅에 내려놓자 방금 전까지 꿈나라를 누비던 때와 달리 의젓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걷는 아이. 따듯한 차에서 내리긴 했어도 이번 겨울 들어와 가장 추운 날씨여서 아이의 옷깃을 여며주고 모자도 잘 씌웠다.

 “어르신, 여러 가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렇게 일찍 어딜 가세요?” 

 “네, 작은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예약 접수하려고요.”

“잘됐네. 나도 그 병원에 볼일이 있거든요.”

아이 손을 잡고 이야길 나누며 병원 앞에 거의 와서야 아차 싶었다. 급히 서두르다 그만 옷 보따리만 챙기고 음식 그릇을 차 안에 둔 채 내린 것이다. 버스가 멀리 떠난 뒤라 차량번호를 알 수도 없었다. 

 



아이한테 신경 쓰다가 저지른 실수를 눈치챌까 싶어 핑계를 둘러대고 먼저 보낸 다음, 해당 노선버스 회사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통화를 했다. 종점 위치를 물어서 직접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전화를 받은 버스회사 직원은 내린 정류장과 시간을 묻더니 해당 버스 기사와 연락을 취해 보겠지만 다른 승객이 가져갔을지 모르니 큰 기대는 말라며 기다려보란다. 하긴 내 생각에도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고, 그 직원도 민원처리 차원에서 형식적으로 답변했을 거라, 추측하였다.

어젯밤부터 정성껏 만든 음식을 아내한테 맛보이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휴대품을 제대로 간수 하지 못한 내 탓이요, 또 잃어버린 게 특별한 귀중품도 아니니 다행이고 누군가 맛있게 먹으면 되지, 위안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얼마 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였다. 버스회사 직원은 내가 내린 버스기사와 연락을 취한 결과, 그렇지 않아도 한 승객이 주인을 찾아달라며 보따리를 운전석에 가져다 놔서 싣고 가는 중이었다는 거다. 그걸 반대편 쪽에서 오고 있는 버스에다 인계하도록 조치했으니 병원 앞 정류장에서 기다렸다가 받으라면서 차량번호를 알려줬다.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정류소로 갔다. 교통정보 시스템 전광판에 해당 노선 차가 6분 뒤에 도착한다는 안내 문자가 떴고 얼마 뒤 버스가 와서 섰다. 차에 오르자 기사님은 눈치로 대뜸 알아보고 반찬 보따리를 넘겨주시는 거였다. 

“아직 아침을 못 먹었는데 맛있는 냄새 참느라고 혼났네요.”

인상부터 서글서글한 기사님은 내가 무안할까봐 농담을 건넸지만, 난 뒤따라 타는 승객들에 폐가 되지 않으려고 고맙다는 인사도 차리는 둥 마는 둥, 급하게 내렸다. 그리고 버스가 떠나가고 나서야 버스회사 여러분들이 나눠 드시도록 건강음료라도 한 박스 사드릴 걸, 뒤늦게 후회하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아침의 일을 곰곰 생각했다. 불과 몇 정류장 사이에서 맺어진 흐뭇했던 인연이 왜 이처럼 가슴에 남는 걸까. 아침 출근길의 만원버스 안에서 서로 밀고 밀리며 짜증을 주고받기도 하겠지만, 이렇듯 일상에서 좋은 이웃들을 많이 만나며 산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배려로 따듯해지는 세상, 참사람의 향기와,  참사랑의 의미를 배워 돌아왔으니 보람 있는 날이었다.

 

정 많으신 할머니도, 아이들과 그들 엄마도, 친절한 버스 기사님도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할 이 시간, 그 모든 이들이 오늘 밤 아름다운 꿈을 꾸리라. 그리고 내일도 우리 동네 마을버스는 수많은 애환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싣고 골목길을 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