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교육재단 소식지「참사람 36.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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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참사람

노숙자와 지갑

글 : 김현숙(참사람 독자)

‘참사람 에세이’은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78번째 편지
노숙자와 지갑

글 : 김현숙(참사람 독자) 

 

 

동네 마트에서 맥주 여러 캔을 사고 나오는 길이었다. 잔돈으로 받은 지폐며 동전들을 지갑에 정리해 넣으려고 잠시 멈춰 섰다. 오른손에 쥐어진 잔돈들이 생각보다 묵직했다. 영수증을 대조해보니 맥주 한 캔을 가게에서 계산하지 않은 듯했다. 고민도 않고 가게로 다시 돌아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머지 돈을 드리니 직원분께서 정말 고맙다며 인사를 하셨다. 적은 액수여도 매출을 정리할 때 비는 돈이 있으면 본인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이 여러모로 많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오늘 하루 잘 보내게 되었다며 활짝 웃는 직원분을 보니 당연한 일을 했음에도 스스로가 뿌듯해졌다. 양심이란 게 나한텐 있나보네, 너스레 생각하며 계산을 끝낸 지갑을 도로 가방에 넣고 가게를 나섰다. 그 순간, 수년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상황은 다르지만 방금처럼 계산을 끝낸 지갑을 도로 가방에 넣고 가게를 나서던 때가 있었다. 평일 아침, 서울역의 모 편의점에서였다.


지방에 살지만 문화생활만큼은 풍족히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대학생 때부터 종종 혼자서 서울을 찾곤 했다
. 왕복 7시간이라는 기나긴 여정도 그렇지만 하룻밤 묵을 숙소 찾기가 무엇보다 내게 제일 고된 일이었다. 매번 서울에 사는 지인들에게 불편을 주긴 싫어서 최소한의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숙소를 찾다가 서울역 근처의 어느 찜질방을 알게 되었다. 시설도 좋고 깔끔하고 무엇보다 여성 수면실이 따로 있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 뒤로 15년이 지난 최근까지 서울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찜질방을 처음으로 가게 된 날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물어물어 갔던 길이 힘들어서라기 보다는 서울역에서 마주친 노숙자들의 행색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서울역 광장 곳곳에 모여 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노숙자들의 모습은 공포심과 혐오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서울을 오고 갈 때마다 서울역 근처 곳곳에서 부딪히게 되는 그들은 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눈앞에 보이면 길을 일부러 돌아돌아 피해가기도 하면서 시야에 잡히지 않게끔 최대한 애를 썼다. 그런 와중에도 피치 못하게 보게 되는 노숙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맛보게 했다. 하루하루 폭염 갱신이라는 뉴스가 떠들썩하게 나오는 한여름에도 두꺼운 니트를 입고 있거나 아침 7시에도 삼삼오오 모여 술판을 벌이거나, 모로 봐도 임신한 상태인 여성 노숙자를 남성 노숙자들이 둘러싸고 있거나.. 뭣하면 막노동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냔 안일한 생각에 그들이 한심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동정심과 안타까움에 속이 상할 때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그들에 대한 인식을 확 바꾸게 만든 계기가 찾아왔다. 서울을 오가는 여느 때처럼 찜질방에서 나와 서울역 푸드코트에서 아침을 먹고 가까운 편의점에 들렀다. 입가심으로 마실 오렌지쥬스를 한 병 사서 느긋하게 편의점 문을 열고 나서다 문득 시계를 보았다. 자칫 하면 약속 시간에 늦을 거 같아 계산을 끝낸 지갑과 오렌지쥬스를 서둘러 가방에 넣으며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걸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를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연히 아니겠지, 하며 계속 서둘러 걷는데 그 소리는 오히려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인기척에 뭐지 싶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행색이 초라한 중년의 노숙자가 한명 서 있었다. 순간 흠칫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평소 서울역 노숙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터였다. 언제든 도망칠 기세로 온몸을 잔뜩 웅그린 채 불안한 눈빛으로 눈앞의 노숙자를 바라봤다. 그런 내 모습이 상당히 불쾌했을 게 뻔한데도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거 떨어뜨렸어요. 지갑."


노숙자가 내게 내민 것이 처음엔 무언가 했다
. 이게 왜 이 사람 손에 있지, 싶은 마음에 한동안 멍해 있었지만 그것은 내 지갑이 분명했다. 상황판단이 안 되는 나를 답답해하며 뇌가 빠르게 되새김질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아까 편의점을 나서다 갑자기 서두르는 바람에 지갑이 가방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렌지쥬스가 병이라서 깨질까 거기에만 신경이 가 있었던 탓에 정작 지갑은 보지도 않고 대충대충 챙겨 넣었고, 그러다 지갑이 가방 속이 아닌 바닥으로 떨어진 듯했다. 급한 마음에 정신도 없었는데다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봤자 소리가 또 얼마나 났겠는가. 이제야 전부 이해가 갔다. 이 노숙자의 손에 내 지갑이 어떻게, 왜 있는지가.

", 정말 감사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얼떨결에 지갑을 받아들었다
.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노숙자는 손사래를 치며 머쓱하게 웃고는 뒤돌아서서 이내 갈 길을 갔다. 어떠한 질척임도 없는 행동이었다.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니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절절함이 끓어올랐다. 이대로 저 사람을 보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뒤쫓아 가 애타게 그 사람을 불러 세웠다. 아까 전과 상황이 반대되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의아하게 쳐다보는 노숙자에게 나는 가방에서 꺼낸 오렌지쥬스를 건넸다.

"지갑 잃어버렸음 저 정말 큰일 날 뻔 했어요. 이거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당장 약속장소에 갈 지하철비도 없었을 것이고, 집으로 돌아갈 시외버스비도 없어 애를 상당히 먹었을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니 그 고마움은 정말 컸다. 그에 반해 마땅히 줄 수 있는 게 오렌지쥬스뿐이라 사례가 너무 초라하지 않나 걱정이 됐다. 그런 나의 염려와는 달리 노숙자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오렌지쥬스를 받았다.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아까의 나처럼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때의 풍경은 아직도 내게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 쥬스병을 품에 안고 뛰어가는 노숙자의 뒷모습이 나의 일상으로 불시에 들어올 때마다 굽어져 있던 등이 바짝 세워진다. 내가 불결하게 여겨왔던 대상이, 양심과 청렴, 정의 따위와는 관계도 없을 거라 마음껏 오해했던 대상이 나의 뒤통수를 거세게 때려버렸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이 그 자리에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던가.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나는 지갑을 돌려줄 수 있었을까. 노숙자에게 하루를 버틴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 지 수 년간 서울역을 오고 가면서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또한 노숙자에게 ''이란 그들을 거리로 내몬 매몰찬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의지하고 구해야 할 간절한 존재인지도 몰랐다. 생존의 문제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내 지갑에 돈이 넘치도록 많진 않았지만 이삼일 정도의 끼니는 풍족하게 먹을 만큼은 있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소주도 많이 마실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주워든 지갑을 나를 향해 건넸다. 발 아프게 뛰어오고 목 아프게 외치는 수고까지 하면서. 게다가 그 어떤 사례조차 바라지 않고 뒤돌아섰다. 그러한 행동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기까지 했다. 그 사람의 양심이란, 청렴이란, 정의란 얼마나 강직하고 단단한가.

나는 나의 옛일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견물생심을 이기지 못하고 남의 물건에 손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엄마의 지갑 속 몇백 원부터 학교 앞 문방구의 연필 한 자루 등이 그 예였다. 머리가 크면서 그러한 나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럽고 비도덕적인 일인지 스스로 깨달았기에 다행히 마침표를 찍었지만, 비양심적인 행동은 일상에서 소소하게 이어졌다. 일부러 문제집이나 교재 값을 부모님께 부풀려 받아 유흥비로 쓰거나 길에서 주운 소액의 돈을 내 마음대로 쓰기도 했다. 이토록 나의 양심이란, 청렴이란, 정의란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했던가. 주마등처럼 여러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이유 없이 눈물이 벌컥, 쏟아졌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얼른 소매로 훔쳐보려 했지만 눈치 없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날의 노숙자가 준 깨달음과 반성은 어떠한 각인처럼 내게 단단히 새겨졌다. 삶에 어떠한 기준점이 되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동네마트에서의 맥주 한캔도 마찬가지다. 그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발걸음을 쉽게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양심 따윈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웬 이득이냐며 어쩌다 주어진 작은 행운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고민도 않고 가게로 갔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가 받았을지도 모를 불이익까지 덕분에 막아냈다. 다른 사람의 하루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치다 우연히 본 벤자민 프랭클린의 명언이 하나 있다. '양심은 성탄절이 계속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 그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날, 그 노숙자의 양심으로 인해 나의 하루 역시 충분히 성탄절이 될 수 있었다. 나와 너와 우리의 성탄절이 계속 될 수 있게끔 앞으로도 나의 양심을 단단히 지키며 살고 싶다. 양심이 만들어내는 성탄절의 기적이 끊임없이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