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교육재단 소식지「참사람 36.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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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참사람

거꾸로 달리면 일등

글 : 권영순(참사람 독자)

 

‘참사람 에세이’는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97번째 편지 

거꾸로 달리면 일등

 

글 : 권영순(참사람 독자)

 

 

우리 가정에는 여러 해째 내려오는 전통이 있다. 수입의 1/10에 해당하는 금액을 따로 떼어 놓았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내가 쓰고 남은 돈으로 남을 돕기는 쉽지 않다. 특히 남편 한 사람에게 온 가정의 경제가 달린 터라 항상 통장 잔액이 달랑달랑하다. 그래서 월급날에 예산의 한 항목으로 미리 떼어둔다. 우리 가정의 삶의 울타리에 이웃의 자리를 들여놓으니 욕심은 밀려나가고 검소한 삶이 친구가 된다.

 

가족 중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으뜸인 분은 30여 년을 함께 사는 시어머니다. 아끼는 데는 대가이시고 나누는 일에는 챔피언이시다. 시어머니의 생활신조는 남을 돕는 손이 되는 것이다. 절약은 100원이 아닌 1원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며 자신을 위해 돈 쓰는 일에는 엄격하리만큼 인색하지만, 남들에게는 손을 활짝 펴고 사신다. 가족과 친척의 경계를 넘어 이웃까지 긴 팔 뻗어 안아 주신다.

 

시어머니께서 잘 아는 분 중에 혼자서 아이를 셋을 키우는 젊은 엄마가 있었다. 노점에서 호떡을 팔아 가족을 돌보는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분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자녀들의 학비를 돕기 위해 장학회를 조직하셨다.

뜻을 같이하는 친구 분들을 모으셨고 매달 소액으로 장학금을 모아 그 가정을 도우셨다. 세 자녀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그 일은 계속되었고 지금도 장학회 사업은 이어지고 있다. 덕분에 외국인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의 주름진 삶이 펴지는 것을 보았다.

 

날마다 피어나는 시어머니의 봉사의 꽃은 요리다. 조미료를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식재료를 손수 재배해서 만드는 음식이라 약이 되고 치료제가 된다. 결혼한 이래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집 주변에 버려진 땅을 용케 찾아내어 텃밭을 가꾸셨다. 덕분에 음식물 찌꺼기를 쓰레기로 버리는 법이 없다. 이렇게 키운 유기농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 필요한 곳곳에 나누신다.

 

남편이 대학교 생활관 관장으로 학생들을 돌볼 때의 일이다. 피부 상태가 좋지 않아 단체 급식 먹기를 힘들어하는 학생이 있었다. 사정을 들은 시어머니는 그 학생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도록 제안하셨다. 그 청년은 1년 동안 푸른 초원 같은 우리 집 채식 식탁을 같이 하였고 놀랍도록 상태가 좋아졌다.

 

아토피가 심한 한 고등학생을 매일 집에 오게 하여 여러 달 식사를 같이하며 고쳐낸 적도 있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이었다. 시어머님이 건강 음식을 잘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채소를 기르셨고 고기반찬 대신 매일 불린 콩을 삶아 갈아서 콩물을 만드셨다. 순두부와 두부도 직접 만들어 내셨고 손만두를 빚으셨다.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차도가 있어 몇 달이 지나자 그 아이의 피부는 기적 같이 말갛게 회복되었다.

 

남들 따라가면 꼴찌가 되지만 뒤돌아서면 1등을 하게 된다고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신다세상의 유행과 풍속을 따르면 자칫 사치와 허영을 좇게 되고 실속이 없는 삶을 살게 되지만 자신만의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꿋꿋하게 살면 보람이 가득하고 사회를 복되게 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대접 받으며 편하게 살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로 행복한 삶을 사시는 어머니의 삶의 방식에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사람은 며느리인 바로 나다. 나는 어런 어머니를 천사라고 부른다.

 

운동 시간을 따로 마련하기 힘든 남편은 이른 새벽 시간에 조깅을 한다. 시어머니는 식사 준비는 당신이 할 테니 같이 운동하라며 내 등을 떠 미신다. 남편과 기분 좋은 아침 운동 겸 데이트를 다녀오면 따끈한 밥과 반찬이 차려져 있다. 수시로 쏟아져 나오는 세탁물은 잘 말려져 동개동개 개켜져 있다. 다림질과 옷 수선도 뚝딱 해결해주신다. 나는 가끔 어머니의 피곤한 발을 마사지해드리고 허리를 주물러 드리기만 하면 된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을 따르는 넓은 길을 뒤돌아서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쁘게 봉사하며 다른 이들의 삶을 돌보는 좁을 길을 1등으로 걸어가시는 시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세상에서 가장 풀기 힘든 문제가 고부갈등이라는데 거꾸로 달리기 선수의 시어머니 덕분에 30여 년을 나와 시어머니는 화목하게 살고 있다. 이제는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호칭이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처럼 감동을 주는 삶이 있고 상품처럼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욕심을 따라 살며 이웃의 아픔과 필요에 문을 닫고 사는 삶은 그 생명이 사라지면 그 흔적도 사라져버린다. 작품 같은 인생은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품성으로 형성된 삶이다. 이런 인생길에는 친절과 동정, 감동과 감사의 향기로운 꽃이 핀다. 그 자취는 오래오래 기억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장기화로 일상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우리 마음에 서로를 품어주는 사랑의 씨앗을 품고 살아갈 때, 그것은 고난의 척박한 땅에서도 싹을 틔우고 따뜻한 인정의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남을 돕는 손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사시는 시어머니의 삶이야말로 거꾸로 가는 길이 아닌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위해 진정 우리가 따라가야 할 참 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