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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참사람

변화의 씨앗이 새싹이 될 때까지

글 : 김세은(참사람 독자)

 

‘참사람 에세이’는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132번째 편지 

변화의 씨앗이 새싹이 될 때까지

 

: 김세은(참사람 독자)

 

 

 

태어났을 때, 우리의 삶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삶이 정말로 시작되는 지점은 우리가 참사람을 만나며, 변화의 씨앗을 선물 받았을 때라고 생각한다.

 

내 삶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되었다. 5학년이 시작된 첫날, 숫기 없는 성격의 나는 새로운 교실의 구석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때 나는 공부는 꽤 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하나도 모른 채 그저 부모님 말만 따르던 아이었다. 교과서에 고개를 박고, 주변은 볼 줄 모르는 아이였기에 교실이 지루하고 재미없었고, 꿈도 없었다. 말만 살아있었지, 사실상 그때의 나는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서히 교실에 활기가 돋을 때쯤, 담임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머금고서!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경계를 하게 된다고 하는데, 나도 그랬다. 왜인지 나와 정반대일 것 같은 이 선생님에게 나는 약간 거리감을 두었고, 그런 채로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시 한 편을 암송하는 게 첫 수업 시간이라는 그 말씀이. 거기다가 조건까지 붙었다, 와다다다 후딱- 끝내버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시를 외우고, ‘낭송할 것. 처음에는 마냥 귀찮았다. 시는 시험공부 할 때나 외우는 것인데, 마음으로 어떻게 외우며 또 어떻게 감정을 실어 낭송을 할 것인가! 막막한 마음을 안고, 교과서에서 눈에 띄는 시 하나를 골랐다. 참 많이도 읽어보았던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었다. 일단 찬찬히 읽어보고, 그다음에는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보드레한, 에메랄드, 실비단 하늘, 살포시, 속삭이는, 웃음 짓는...

 

그때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시가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어느새 난 그 시의 따스함을, 설렘을 내 삶으로 끌어와 상상하고 있었다. 산책 하며 하늘 햇살을 바라본 경험, 제주도에서 돌담을 본 경험, 그때의 그 감정들을 무한히 떠올렸다. 심지어 암송을 할 때, 원래였다면 긴장할까- 실수할까- 걱정했어야 하는데 이 시는 곧 내 삶이다.’ 라는 마음으로 단어 단어를 뱉었다. 그날 숙제로 일기를 썼는데, 선생님이 나의 모습이 빛난다는코멘트를 달아주셨다. 평생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뿐만이 아니었다. 매번 이런 방식으로 선생님은 나한테 세상에 나아갈 용기를 주셨다. 선생님도 아픈 날, 속상하신 날, 힘드신 날이 있었을텐데 일년 동안 내 모든 일기에 빠짐없이 용기를 달아주셨다. 공부만 하지 말고, 운동을 시작해보라는 말에 줄넘기를 시작했다. , 외로웠던 내게 친구들에게 용기 내어 말을 걸어보는 게 어떨까라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하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한 번 더 용기를 냈고, 나는 어느새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한 해 동안 찬란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작은 세상에서만 있고 싶어했던 나는 언젠가부터 여행도 다니고 피아노도 배우고, 식물도 키워보고, 우리끼리만 영화라고 부르는 영상도 찍었다. 큰 세상에 나오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픈 일, 절망스러운 일보다는 눈부신 일이, 활기찬 일이, 행복한 일이 훨씬 더 많았다.

 

돌이켜보면 선생님께 배운 교과서 지식은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인생을 살면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의 아름다움, 진정한 교육과 스승의 의미는 아직까지도 내게 깊게 새겨져 있다. 5학년이 끝나고 6학년이 되는 걸 두려워했던 나를 꽉 안아주시며 편지를 써주신 날에, 그리고 6학년을 마치고 중학생이 되는 나를 다시 한 번 더 꽉 안아주신 날에 깨달았던 것 같다. 참사람은 사람에게 변화의 씨앗을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 변화의 씨앗을 그냥 던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새싹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이라고. 씨앗은 죽을 수도, 새싹을 빨리 피울 수도, 새싹을 아주 느리게 피울 수도 있다. 변화의 씨앗을 선물해주고, 그것이 새싹을 피울 때까지 끝까지 지속해서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이렇게 자신이 뿌린 씨앗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배운 경험들, 내가 받았던 따뜻함 들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나도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살자라는 가치관이 생겼다. 그리고 내 삶은 정말 충만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교육봉사를 방학 때마다 다니며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나도 전해주었고 지금은 교육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열심히 대학에 다니고 있다. 활자만 볼 줄 알았던 어린 아이를 그 선생님께서 세상 밖으로 끌어준 것이고, 나는 덕분에 지금까지 세상 밖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 다시 그때 선생님이 채워주셨던 건 뭐였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씨앗을 뿌린 후 진심을 다했던 그 시간과 정성들이 날 채워주어 나만의 새싹을 가진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삶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도 언젠가 어린 시절의 나 같은 아이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