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교육재단 소식지「참사람 36.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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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참사람

버스 기사님께 배운 주인공의 품격

글 : 서은수(참사람 독자)

 

‘참사람 에세이’는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98번째 편지 

버스 기사님께 배운 주인공의 품격

 

글 : 서은수(참사람 독자)

 

 

나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삶에 쫒기는 기분이 들 때면,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곤 한다. 올해로 대학교 3학년이자 스물 세 살, 슬슬 독립된 성인으로서 세상에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나를 옥죄어 온다.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다 보면 그저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갇힌다.

 

조급함은 어느샌가 마음속에 세상을 우열로 평가하는 못난 잣대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보면 정작 내가 인생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지는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이런 불안감을 잠재우고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해 돌이켜볼 수 있게 해주는 참사람한 분이 계시다.

 

중학생 시절, 학교를 오가는 마을버스에는 넉살 좋은 기사님이 한 분 계셨다. 매일 아침과 오후마다 오르는 그 버스는 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의 시작이자 마무리였다. 등하교 시간대의 버스 안은 항상 붐볐고, 어쩔 때는 조수석에까지 학생을 앉혀야 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몸을 구겨넣은 채 학교까지 가는 것은 꽤나 스트레스가 큰 일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기사님의 차를 탈 때만은 달랐다. 말끔하게 깎은 머리와 수염, 그리고 안경이 마치 스티브 잡스를 닮아 인상적이었던 그 분은 늘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 주셨다.

 

공주님, 문이 닫히면 위험하니 조심하세요~”

왕자님, 오늘 넥타이를 멋지게 맸네?”

 

처음 기사님께서 우리를 공주님, 왕자님이라 부르실 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 컸다고 믿는 중학생들에게 어린이 때나 듣던 애칭을 붙이니 오그라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님은 늘 한명 한명 거울로 눈을 맞춰가며 미소와 인사를 건네셨고, 어느새 모두들 그분을 좋아하게 되었다.

 

기사님은 버스를 자주 타는 승객들에게는 얼굴을 기억하며 안부를 물어보기도 하고, 내릴 때는 좋은 하루 보내요~” 라며 응원을 잊지 않으셨다. 덕분에 버스 안은 분위기가 항상 따뜻했고, 승객들 역시 붐비는 와중에도 서로 예민하게 구는 일이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주고받는 인사말 덕분에 하루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어 등굣길을 정말 좋아했다. 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마을 버스를 기다릴 때면 그 기사님을 만나기를 기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의 가치관에 큰 깨달음을 준 일이 발생한다. 스카이가 아니면 의미 없고,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한 사람이라 여겼던 오만한 어린 내가 버스 기사라는 직업에 처음으로 진심어린 존경심을 느낀 것이다.

 

그날은 1111일 빼빼로 데이였다. 친구들끼리 서로 막대과자를 주고 받으며 우정과 인기를 과시하는 날이기에, 그런 기념일에 받는 선물의 개수를 자신의 존재가치와 직결시키는 중학생들은 모두들 들뜬 동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죽하면 전날 공개적으로 미리 선물 교환상대를 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학교 분위기를 둘러보면 자랑스러워 하는 친구들만큼 속상해 보이는 친구들이 많았고, 나 역시 손에 쥔 과자의 개수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길, 나는 친구관계에 대한 고민에 빠져 시무룩해 있었다. ‘과자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싫지만 누군가 하나라도 더 준다면 얼마나 기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류장에서 내리기 직전, 갑자기 기사님께서 커다란 검은 봉지를 뒤적이시더니 내게 막대과자 하나를 내미시는 것이 아닌가! 이어 내 뒤로 오는 학생들에게도 모두 과자를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거울로 한명씩 눈을 맞추시며 "맛있게 드세요" 라고 미소를 지어 주시는 것이다

 

순간 진심으로 감동받아 그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지금 돌이켜 보면, 기사님께서는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직접 사비를 들여 사랑을 전해주신 것이다.

 

그때 나는 친밀한 기사님께 과자를 받았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을 뿐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며 다른 많은 추억들 중에도 유난히 선명하고 마음을 울리는 장면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졸업을 하고 고등학생, 성인으로 사회에 물들어가는 동안 줄곧 사람의 우열을 평가하는 잣대들을 마주했음에도, 기억 속 스티브잡스 버스 기사님은 마음 속에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되어 주셨다.

 

요즘 세상이 각박하다고들 한다. 버스나 택시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기사 분들이 혼자 욕설을 내뱉거나 인내심 없이 승객을 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아마도 오랜 시간 운전석에 앉아 휴식도 없이 일해야만 하는 고됨이 그분들 마음 속 여유를 빼앗아 갔을 것이다. 혹은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버텨야 하는 현실에 분노하시는 것 같다.

 

반면 스티브잡스기사님은 항상 타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천천히, 부드럽게 운전을 하셨고 커브에서는 꼭 잡으세요와 같은 작은 말 한마디로 혹시라도 누군가 다칠 상황들을 헤아리셨다. 나는 불친절한 버스 기사분들게 불평할 생각은 없다. 모두들 열심히 살아남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영감을 준 기사님은 자신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알고 계셨다.

 

기사님을 보며 나는 세상의 모든 일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역할이란 사실을 배웠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태도이다. 또 나중에 내가 어떤 직업을 갖던지 그 역할 속의 가치를 찾아내어 빛내는 존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궁극적으로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참사람이란 사회적 계층과는 상관 없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에게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그 분께 버스 기사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여쭤봤을 때, 매우 고되다고 답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분은 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함을 심어주셨다. 이런 분이야말로 진정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닐까?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에게 열등감과 부러움 대신 감동을 불러올 수 있는 존재가 되리라는 용기를 품을 수 있다. ‘살아남기에 대한 조급함에 시야가 갇혀있을 때 살아가기의 중요성을 되새기며 세상을 올곧이 바라볼 수 있다.

 

만약 우연히 기사님을 다시 만난다면, 꼭 그분이 보여주신 작은 친절과 삶의 태도가 청소년기의 내게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는지 말씀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아주 맛있는 과자를 잔뜩 선물해드리고 싶다. 어린시절 내가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