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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머리 걔.

염색을 한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이 유난히 밝은 빛인 1학년 3반 그 아이를 부르는 말이다.

그냥 ‘갈색 머리’도 아니고 왜 갈색 머리 ‘걔’인가 하면 그건, 반 아이들과 섞이지 않고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그 아이만의 분위기 때문이다.

소속된 조직에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맘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아이는 불편한 대상이라기보다 그냥 존재감이 없는 편에 가까웠다.

미안하지만 정말 그랬다.

그 아이는 눈이 마주치면 잘 웃었다. 딱히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아이의 목소리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건 그 웃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리 좀 바꿔줄래?’ 등등의 부탁을 하면 그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눈이 작아서 웃으면 눈을 감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가끔 앞이 보이는 건가 궁금하긴 했다.

그 아이는 표정이 다양했다. 그리고 제스처도 큰 편이라 만약 수다스러운 편이었다면 꽤 어수선했을 텐데 그 아이는 말수가 적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수시 전형에 지원하기로 계획한 아이들은 점점 바빠졌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수행평가도 챙기고 또 일정이 발표된 교내 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도 하느라 분주했다. 나도 그랬다. 아직 고1이지만 국문학과에 지원하고 싶은 나는 교내 시 암송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렇게 바쁜 어느 9월, 국어 수업시간이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시나리오를 읽기로 한 날이었는데 아무도 읽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따로 배역을 정하지 않고 맨 앞자리에서부터 한 명씩 돌아가며 읽기로 했다. 맨 끝자리에 앉은 그 아이는 어쩌다 보니 주인공 정원의 마지막 대사를 읽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오오, 뭔가 달랐다. 맑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귀에 확 박혔다. 그렇지만 연기를 하듯 감정을 넣어 읽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반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며 웃기 시작했다. 웃는 아이들에게 선생님께서 주의를 주셨다.

“조용히 해!! 강의건, 발성이 남다르네. 좋아, 계속 읽어,”

잠시 당황했던 갈색머리 걔, 의건이는 마지막 대사를 읽었다.

“...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읽는 의건이가 신기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의건아, 너 이번 시 암송 대회에 참가하니? 아직 신청 안했으면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와. 시 목록 줄 테니까.“

이른 입시 준비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의건이에게 선생님께서 직접 대회 참가를 권유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수상 경력이 필요 없는 의건이가 만에 하나, 혹시라도 수상을 한다면 그게 그 아이에 무슨 소용이 될 것이며 게다가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며 준비하는 학생에게는 오히려  민폐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잠시, 1.5초 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기심을 반성할 틈도 없이 어차피 의건이는 암송하는 게 귀찮아서 신청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서 내 마음은 이런 저런 다른 바쁜 일들로 날아가 버렸다.

시 암송 대회 날이 되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기분이 엉망이었다. 전교 1등 유은혜가 주요한의 불놀이를 암송했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긴 그 시를, 심지어 시 같지도 않게 주절주절 길어서 중얼대는 것 같은 그 시를 은혜는 빠른 속도로 암기해냈다. 마치 숨도 쉬지 않는 같았다. 은혜만큼은 아니라도 대부분 다른 친구들도 어렵고 긴 시를 선택해서 속사포 랩퍼도 놀랄 만큼 빠르게 암기했다. 그건 분명 암송이 아니라 암기였다. 내 차례가 왔을 때는 기가 죽어서 그랬는지 나는 중간에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기를 빨린 기분으로 늘어져 있는데 의건이가 무대로 올라왔다. 다른 반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뜻밖이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대회를 망쳐서일까, 나야말로 의외로 마음이 편해지면서 조금 설레기도 했다.

우리 반 강의건은 얼굴이 눈을 먹는 웃음을 담아 꾸벅 인사하고 나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라는 시였다. 의건이의 낮은 목소리는 느려졌다가도 빨라지고 또박또박 들렸다가도 다시 조그맣게 바뀌곤 했다. 무엇보다도, 결코 짧지 않은 그 시를 끝까지 다 외워서 들려줬다는 게 놀라웠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늘 웃는 얼굴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던 의건이의 작은 눈은 무대 위에서 서니 잘 보였다.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게 반짝반짝 빛났다. 대회가 끝이 나고 유은혜를 비롯한 몇 명의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상을 받았다. 다행히 나도 받았다. 하지만 나도 받은 상을 의건이는 상을 받지는 못했다. 부끄럽긴 했지만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의건이도 상이 필요했던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국어 시간이 되자 선생님과 반 아이들은 내가 아니라 의건이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나도 진심으로 힘껏 박수치고 엄지손가락도 한껏 올려줬다. 의건이는 진짜 멋있었거든.

갈색 머리 걔.

머리카락이 유난히 밝은 빛이 돌던 1학년 3반 강의건을 부르던 말이다.

그렇게 갈색 머리 걔는 다시 강의건이 되었다.

언젠가 배우가 되어 무대에서 연기가 하고 싶은 의건이의 꿈을 우리 모두 알게 되었으니 이제 ‘걔’가 아니라 의건이다. 우리 반에서 최초 발굴 발견된 미래의 스타 강의건은 지금도 평소엔 웃느라 눈이 안 보이지만 그 눈이 엄청나게 빛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