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품생품사 제9화 '다름의 인정'편
교보교육재단 청소년 인성 콘텐츠 품생품사, 제9화의 주제는 ‘다름의 인정’입니다. 여러분은 남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거나, 어딘가 보편적이지 못한 행동양식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웹툰의 주인공 ‘정민’은 누가 봐도 모범생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고, 출석 잘 하고, 숙제 밀리지 않는 것이 곧 학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정민에게 짝궁 ‘재민’은 좋게 말 하면 자유로운 영혼, 나쁘게 말하면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녀석 같아요. 학교 수업보다 시골에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재민, 하지만 정민은 그런 재민을 곁에서 지켜보며 조금씩 성장하게 됩니다.

그믐달이든 보름달이든, 어쨌거나 같은 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양이 다르기에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본질을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에세이의 주인공 지수도 그렇습니다. 제스처, 말투, 표정 등 어딘가 남다른 모습의 승우를 쉽게 판단하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실험실의 에피소드를 통해, 지수는 승우의 개성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믐이든 보름이든, 어쨌거나 따스한 빛깔을 가진 ‘달’인데 모양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육을 받으며, 비슷한 색깔을 가진 그룹에 소속됨으로서 안정감을 느끼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나와 다른 사람’은 주로 불편함의 대상이 됩니다. 사고방식이 다르거나, 표현방식이 다르거나, 남들은 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 말이죠. 하지만 그들 모두 그저 조금 다를 뿐이지 결코 틀린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내가 느끼는 불편을 아주 조금만 감수한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과 시야가 부여될 것입니다. 나와 꼭 닮은 사람들을 통해서 좀처럼 성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름의 충돌이야 말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예요. 차이를 존중할 줄 아는 여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회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이번 화는 품생품사 사례발굴위원 도선고 우선하 교사의 도움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믐이 보름에게:다르지만 모두 달입니다

“지수야, 어디 가니?”

 

덜 마른 옷과 드라이어를 들고 왔다 갔다 할 때부터 나를 지켜보셨던 할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네.”

 

 나는 ‘어디 가느라’ 준비 중이었다. 아파트 상가에 새로 생긴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으니까. 수제 햄버거 가게는 입점 기념 세트 메뉴가 무척 은혜롭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온라인 수업이 끝나는 대로 혜린이가 상가 앞으로 나온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던 혜린이의 기분 전환도 할 겸 수업이 끝나면 서둘러 바로 출동~해야 했는데 바쁜 내 마음 같지 않게 평소보다 더 늦어지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과제 제출이 쉽지 않았고, 좀 전에 막 갈아입은 옷은 왠지 보송보송하지 않아 잔뜩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마음이 마냥 분주했다. 그래서 미처 할머니의 얼굴을, 표정을 바라볼 틈이 없었다. 신발을 대충 신고 급하게 나가려던 나는 결국 현관에서 엄마의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이지수! 어른이 뭔가 물어보시면 말씀하신 뜻을 생각해보고 대답을 제대로 해드려야지. 할머니랑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정신없이 아무렇게나 그게 뭐야?”

 

그런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셔서, 내가 어디 가려는 중이니까 그렇다고 대답한 게 그렇게나 큰 잘못일까?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약속에 늦지 않는 것도 나에겐 중요하다고요! 아, 결국 대혜자 세트 메뉴는 놓치고 말았다. 하루 30개 한정이란다. 25분이나 나를 기다려 준 혜린이에게 미안해서 급하게 음료수부터 주문했다.

 

“아무래도 걔는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고, 어떨 땐 자존심 상해, 너무.”

 

혜린이다. 음료수를 마시지도 않고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내고 있는 혜린이의 얼굴은 무척 붉었다. 혜린이가 흥분한 것은 나의 지각 탓도 아니고 바로 앞에서 놓친 세트 메뉴 때문도 아니었다. 

 

혜린이의 뺨을 붉게 물들인 범인은 바로바로 승우, 얼음 왕자 현승우였다. 승우는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크다. 얼굴도 하얀 애가 키는 또 185센티가 넘어서 엄청 눈에 띈다. 나도 처음엔 승우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농담도 자주 하고 장난도 자주 걸었다. 하지만 승우는 내 장난을 좀처럼 받아주지 않았었다. 나는 하루에 한 번 장난을 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아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다. 내 농담에 즐거워하는 친구들을 보면 꼭 종합 비타민을 먹은 것처럼 기운이 솟아난다. 그런데 승우는 내 농담에도 무반응이었다. 현승우,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을 주는 이 도도하고 건방진 녀석. 혜린이의 얘기를 들으며 지난날의 수모를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승우 걘 틀려먹었어. 사람이 말을 걸면 제대로 대답을 해야지. 그렇게 싹 먹고 마냐?”

 

좀 전에 엄마가 나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 반복해 놓고 나는 속으로 좀 움찔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승우와 나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께 아예 대답을 안 한 건 아니니까.

 

“근데 신기한 건 걔, 문자할 땐 안 그래. 되게 다정하고 사려 깊어.”

“어?????”

 

승우와 문자로 말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온라인에서의 승우가 어떤지 몰랐다. 그래서 이런 혜린이에게는 적극적으로 공감해 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는 그저 혜린이의 속상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데에 집중하면 되었었는데 어느새 미묘하게 태도가 바뀐 혜린의 말을 듣고 나는 당황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혜린이는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그냥 하도 잘나서 우리처럼 평범한 애들이랑은 말 섞기가 싫은 거겠지. 안 그러면 어쩜 그렇게 목소리 듣기가 어렵니? 혜린이 너 승우 목소리 알아? 말투나 뭐 그런 거 기억나는 게 있어? 난 생각이 전혀 안 나.”

 

나는 일단 전투력을 총동원했다. 괜한 짓인 것도 모르고.

 

“근데 지수야. 난 궁금하긴 해. 승우가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솔직한 혜린이의 말에 난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어? 그래? 하긴....”

 

하긴 나도 그랬다. 오늘 들은 꾸중 때문에, 습기를 한껏 품은 옷 때문에, 그리고 혼자 기대했다가 승우의 썰렁한 반응에 실망했던 그 흑역사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정의 전염이 빠른 내 특성상 오늘은 혜린이의 정서에 심하게 이입하느라 표현이 과해졌을 뿐 사실 나에게도 승우는 여전히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아이였으니까.

 

“그래, 차라리 뭐든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 친해지긴 어려워도 이해라도 하게. 오해보단 이해가 낫잖아.”

 

나도 어느새 속마음이 쏙 튀어나왔다.

 

“그치. 첨엔 그냥 틀려먹은 애라고 생각하고 나도 무시해버리면 맘이 편해질 줄 알았어. 근데 이게 이상하게 쉽지가 않더라고. 애가 말을 안 해도 가끔 대답이 들릴 때가 있어. 그게 진짜 걔 말인지 내 바람을 담은 내 맘인지 모르지만.”

“워,워..야, 그건 아니지. 환청이냐?”

 

진지한 분위기를 유난히 잘 못 참는 나는 혜린이의 말을 막다가 문득 승우의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근데 그게, 승우는 대답도 안 하고 모른 척할 때가 있어도 웃을 때 보면 세상 무해한 얼굴이잖아. 좀 억울한 오해를 받아도 묵묵히 그냥 있고.”

 

그러자 혜린이 눈이 반짝했다.

 

“그치? 표정 보면 알잖아. 남을 무시하고 있는 건지, 당황하고 있는 건지. 걘 누구한테 일부러 상처 주려고 하는 애는 절대 아니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린이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알긴 아는데 그래도 난 승우 태도에 자꾸 상처받는 것도 사실이야. 근데 그것도 생각해 보면 걔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 같아. 걔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미리 가서 다 받고 그러고 있더라고.”

“헉! 정답. 그러고 보니 내가 그랬던 것 같아. 맞네. 나도 나도. 나도 그랬네.”

 

등교 수업을 하는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혜린, 승우, 재환이와 같은 모둠이 되어 과학 실험을 하게 되었다. 혜린이는 승우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려고 애쓰지 않았다. 나도 오늘은 굳이 일부러 장난을 쳐서 친구들을 웃겨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승우와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재환이는 ‘미친 과학자’라는 별명답게 실험 과정에 상당히 몰입했다. 다른 모둠들은 실험을 진행하는 내내 소란했지만 우리는 모두 말없이 실험 과정에 진지하게 집중했다. 

 

굳이 말은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살펴보며 눈짓과 손짓으로 충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실험의 마무리 단계에서 재환이가 피펫을 사용하여 정밀한 양의 시약을 옮겨야 할 때였다. 

 

나와 혜린이와 승우는 숨을 죽이고 재환이의 손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인류의 생존이 달린 중요한 실험 중인 것처럼 우린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시약을 간절하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둠원 모두 이 순간만큼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시약이 옮겨지자 우리는 재환이의 손에서 시선을 거두고 서로의 눈을 봤다. 흐뭇한 눈짓을 서로에게 전하는데 승우가 먼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도 혜린이도 승우를 따라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우린 세상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본부로 복귀하는, 재난 영화의 주인공들 같았다. 그제야 나는 웃음이 팍 터졌다. 

 

“재훈아 수고했어.”

 

승우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의외였다. 내가 크게 웃는 바람에 승우의 목소리를 다른 모둠의 친구들은 듣지 못했다. 다른 모둠의 실험을 도와주시던 선생님께서는 걱정이 담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하지만 우리들의 표정을 보시고는 실험의 결과가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신 뒤에 우리 모두와 하나하나 눈을 맞춰 바라봐 주셨다. 선생님이 우리를 따뜻하고 흐뭇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신기했다. 아무도 상처 주지 않아도 저절로 상처 입을 때가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안 들리던 말이 차츰차츰 들릴 수도 있다는 게 말이다. 

 


나는 단톡방을 만들고 승우과 혜린이와 재환이를 초대했다. 단톡방의 이름은 <실험적 하루>로 정했다. 혜린이의 말처럼 승우는 단톡방에서는 무척 다정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대답을 잘 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더니 승우는 수줍어서 그렇다고 얘기했다. 대답하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라 대답이 바로 말로 나오지 않을 때가 있어서 그런 건데 편해지고 친해지면 차차 덜 그런다며 무척 미안해했다. 

 

승우의 솔직한 대답을 듣게 되자 이번엔 내가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사과했다. 내가 과하게 치대는 성격이어서 수줍은 승우에게 부담이었겠다고 했더니 승우는 사실 내 장난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했다. 아, 그래? 그런 거였어? 재미있었으면 됐어. 평화!

 

나는 이 <실험적 하루> 단톡방 대화를 통해, 포복절도만이 내게 비타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론 묵언 수행자의 피를 가진 친구의 나노 입자 크기의 리액션에도 큰 힘을 받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수야, 어디 가니?’ 할머니의 다정한 이 말은 외출 예정이냐는 정보만을 묻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밥을 먹을 때가 되었는데 밥은 꼭 먹어야 한다는 당부도 들어 있고, 날씨가 좋지 않으니까 더운 곳에서 오래 고생하지 말았으면 하는 걱정도 담겨 있고, 손녀가 안전한 곳으로 가는 중인지 어떤지 궁금함도 함께 담겨 있는 말이라는 것도 문득 깨달았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을 때 내가 뒤를 돌아 할머니의 표정을 봤더라면 모든 소통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담은 ‘네’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을 텐데. 늦어서 바쁘고 또 옷 때문에 짜증이 나서 길게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면 할머니를 바라보고 ‘히잉’하는 불쌍한 표정만 지었어도 내 맘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래, 승우와 나는 다르다. 다른 게 분명하다. 그런데 내성적인 승우는 대답을 잘 하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고, 반면에 나는 대답은 아주아주 잘하지만 어쩌면 내가 내킬 때만 다른 사람의 말을, 아니 맘을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하루에 두 가지 이상 깨달으면 너무 어른 같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 집에 가면 우리 할머니를 말없이 꼭 안아 드려야겠다. 왠지 그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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