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품생품사 2화 '나의 정의, 타인의 정의'편
교보교육재단의 청소년 인성교육 콘텐츠 ‘품생품사’, 제2화는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피해와 상처를 안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김새와 목소리가 제 각각인 것처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윤리관과 정의관 또한 모두 다른 모양과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선의의 거짓말이 내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방편의 하나이지만, 또 어떤 사람은 종류와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거짓말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배려는 부담이 될 수 있으며, 고민이 부재된 정의의 실천은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이미지와 실제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전개되는 양상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합니다.

실천에 앞서 고민해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잘못을 벌하는 일이 과연 나의 몫일까요? 타인의 정의보다는 나의 정의가 더 우위에 있을까요? 누군가를 돕는 일이라면 상대의 동의 없이 일을 벌여도 괜찮은 걸까요? 이 모든 물음에 깊이 있는 통찰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가 가진 개별의 정서와 개별의 윤리관, 그 다름의 이해와 소통이 함께 이루어졌을 때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아름다운 배려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번 화는 품생품사 사례발굴위원(경성고 신규진 교사/중동고 김정희 교사/호원고 이경화 교사)의 도움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도벽과 생활

원래 있었는지조차 잊고 있던 ‘운동과 건강생활’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문학책을 꺼내려던 반장 지현이가 사물함을 열자마자 반 인원수에 딱 맞는 27권의 체육 교과서들이 사물함 밖으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느닷없는 출몰에 놀란 지현이가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수습하도록 한 문학 선생님은 책에 적힌 이름을 불러 몇몇에게는 책을 돌려 주셨다. 숨바꼭질을 하듯 지현이의 사물함에 숨어있던 책에는 이름이 적힌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았다. 미처 제 주인과 만나지 못한 이름 없는 ‘운동과 생활’들은 쉬는 시간에 정리하기로 하고 수업은 시작되었다.

 

누가 이렇게 깜찍한 장난을 ‘은밀하게 위대하게’ 계획했을까? 아이들은 오랜만에 포착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이 우연한 기회를 반가워하며 눈이 반짝 빛났고 그로 인해 교실 전체에는 알 수 없는 활기가 넘쳤다. 먼저 지현이의 짝 민혜가 몰래 카메라 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추리소설 마니아인 우주가 바로 반박했다.

 

“몰카? 아냐, 아냐. 장난이 목적이면 체육책을 숨겨서 뭐하냐? 나는 그거 내가 가지고 있던 것도 까먹고 있었는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실패한 기획이야. 탈락!” “헌책방 같은 데나 중고로 팔려던 걸 수도 있지 않나?”

 

명랑 소녀 희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혜는,

 

“체육책을 누가 사냐? 게다가 어디 잘 숨겨둔 것도 아니고 하필 지현이 사물함에 대충 구겨 넣어둔 것도 이상하잖아. 보관이 아니라 방치야, 방치! 그리고·······. ”

“야, 그거, 애니 그거 같아. 뭐더라? 카우보이 인형 나오는 거.”

“우디! 아, 토이 스토리?“

"어, 그건가? 하여튼 그 애니 보면 왜, 아이들 없으면 막 장난감끼리 움직이고 그러잖아.”

 

작은 서영이와 큰 서영이도 신이 났다.

 

“깊이 생각해보니까 기분이 으스스하다. 지현이 사물함을 열고 ‘운동과 건강생활’ 얘네들이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그림 상상해 봐. 그것도 그렇고, 아님 어떤 누군가가, 무표정으로 한 권, 한 권.. 똑같은 책을 착착 넣고 있는 그림도 좀······.”

“어우, 야아아~”

 

교무실에서도 ‘운동과 건강생활’의 이상한 실종과 우연한 발견이 그날의 이슈였다. 하지만 교실과는 그 분위기가 퍽 달랐다. 막연한 상상만이 아닌, 조금 더 구체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추측이 오고 갔다. 걱정이 가득 담긴 낮고 조용한 목소리는 간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 할머니랑 단둘이 살고 있대요. 건강도 안 좋으신데 틈틈이 폐지 수거도 하신대요. 이른 새벽에는 할머니 걱정이 되어서 따라서 같이 나갈 때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할머니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애틋하죠. 평소에도 희지가 참 맑잖아요.“

“아, 아이가 워낙 밝고 명랑해서 저는 전혀 몰랐어요. 기특하기도 해라.”

“혹시 희지가 말이에요, 아이들이 쓰지도 않는 책들이니까 모아다가 할머니 드리려던 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설마요, 하....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 맘이 짠하네요.”

“그러게요.”

 

선생님들의 대화는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건너편에 앉아계신 과학 선생님께도 너무나 자세하게 들려왔다. 아무 말씀 없이 듣고 계시던 과학 선생님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시는 것으로 불편함을 나타내셨다. ‘만약에’라든지, ‘어쩌면’으로 시작하는 말 중에는 때때로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과학 선생님은 알고 계셨다.

 

교무실에 퍼지는 이 불편하고 안타까운 공기를 흡입한 사람은 선생님들만이 아니었다. 숙제를 찾으러 갔던 우주가 귀를 쫑긋 세우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앞으로 탐정이 될지도 모르는 추리 소설 마니아 우주는 샤샤삭 조용히 나왔다. 교실로 돌아와 숙제 검사를 마친 공책들을 교탁 위에 올려 둔 우주는 지현이와 희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부모님 모두 변호사이신 지현이가 입은 브랜드 교복과 명랑 소녀 희지의 정갈하지만 낡은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차이였다. 잘 몰랐던 일이라도 우연한 기회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법인가 보다. 가방도 신발도 희지의 것은 유난히 낡아보였다. 지현이와의 비교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반 아이들과 희지의 모습을 하나 하나 자세히 살펴 보다가 우주는 희지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처럼 해사하게 웃는 희지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날 저녁, 우주는 단톡방을 만들어서 친구들을 초대했다. 원래 반 전체가 사용하던 단톡방이 있었지만 새로 만들었다. 새 단톡방에 희지는 없었다.

 

 

아이들은 우주가 교무실에서 물어온 후 나누어준 희지 이야기에 놀랐지만 곧 마음 아파했고, 감동했다. 그리고 희지를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우주의 말에 공감했다. 명랑 소녀 희지는 모두에게 이미 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들이, 희지에게 ‘더’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싶은 뭉클한 마음이 순간 용솟음쳤다. 폐품을 모아보자는 작은 서영이의 말에 큰 서영이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민혜가 그건 별로 신통한 도움이 되지도 못할 뿐더러 관리, 보관, 운반 등으로 번거롭기만 할 거라고 의외로 이성적인 반박을 해왔다. 꽤 오래 톡을 주고받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줘야할 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그냥 좀 더 지켜보면서 며칠 더 상의하고 결정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뿌듯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샤프심 하나만.” 샤프심을 빌리기 위해 뒤를 돌아본 희지는 우주와 눈이 마주쳤다. 희지를 바라보던 우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주 보고 싱긋 웃던 희지는 갑자기 자신의 등을 향해 뒤로 손을 뻗으며

 

“등에 뭐 붙여둔 게 분명한데...... 너 표정이 어색한 게 수상해!”

“아니야, 내가 무슨... 아니야.”

“근데 왜 그렇게 허둥대는 거야? 오호. 뭔가 있네, 있어!!”

 

재미있는 장난거리를 발견한 듯 신이 난 희지는 아이들을 돌아봤다. 아이들은 활짝 웃는 것도 아니고 무관심한 표정도 아닌 애매한 얼굴을 하고 멈춘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때 민혜가

 

“희지야, 샤프심 필요하다며? 너 B 쓰지? 난 HB만 써서..진한 심 쓰는 사람?”

 

민혜도 평소와는 다른, 어딘가 과한 느낌이었다. 우주와 민혜 뿐 아니라 아이들이 모두 비슷하게 순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희지는 기분이 묘했다.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이들은 희지를 돕기 위한 비밀 이야기를 아이들은 이어갔다. 한편 희지는 조금씩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을 뺀 나머지 모든 반 아이들이 유명 학원에서 대행사 중인 친절 도우미반을 단체로 수강하고 온 게 아닐까 하는 괴상한 상상도 했다. 때론 아이들이 과한 게 아니라 어쩌면 반대로 자신이 과하게 예민해진 탓인지도 돌아보며 생각이 복잡해진 희지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희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더 잘 배려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해온 아이들 중 아무도, 명랑 소녀 희지가 더 이상 명랑하지 않게 된 것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희지를 불편하게 하는 줄 모르는 희지 프로젝트는 그렇게 한 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현이가 1교시가 지나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짝 민혜가 쉬는 시간에 연락을 해 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오후에 급한 연락을 받은 담임 선생님은 문학 선생님에게 종례를 부탁하시고 외출을 하셨다. 학교 인근 지구대에 도착한 담임 선생님은 핏기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지현이를 발견하셨다.

 

지현이는 아침에 들른 편의점에서 지우개 하나를 몰래 자신의 가방에 넣다가 주인에게 들켰다고 했다. 계산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나가려는 지현이를 불러 세운 주인은 가방을 열어보라고 요구했지만 하얗게 질린 지현이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서 지우개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주인은 자신이 본 지우개 외에도 다른 물건도 훔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 더 심하게 다그쳤지만 지현이는 끝내 입을 꼭 다물었다고 했다. 결국 화가 난 주인이 지구대에 신고를 했고, 이 미미한 도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지현이를 달래어 가방 속을 열어보았다고.

 

“뭔가 다른 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이 편의점에서 파는 지우개가 아닌 지우개가, 쓰던 건 아니고 아직 뜯지 않은 새 지우개가 무려 26개나 나왔어요. 아마 근처 문구점이나 다른 곳에서 하나씩 따로 가져온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

“형사 미성년자는 아닙니다만 지구대에 신고해 온 편의점주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고, 학생 스스로도 반성하고 있어서 훈방 조치할 예정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지현이 가방 속 26개의 지우개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생리도벽’에 관한 경찰관의 설명을 들으면서 지현이의 사물함에서 발견된 ‘운동과 건강생활’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꼭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체육 교과서 사건에 대한 자신의 추리가 틀린 것쯤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등줄기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밝고 명랑한 희지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며칠 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서야 담임 선생님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사과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늘게 떠는 지현이의 손을 잡고 지구대를 나서는 선생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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