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교육재단 소식지「참사람 36.5˚C」
  • 네이버블로그 바로가기
  • 유튜브 바로가기

ebook보기

내가 만난 참사람

경비 아저씨의 은유

글 : 조수민(참사람 독자)

‘참사람 에세이’는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77번째 편지
경비아저씨의 은유

글 : 조수민(참사람 독자)

 

 

“안녕하세요” 그리고 “안녕” 

 

언제부터인가 개인과 개인 사이를 이어주던 따뜻한 인사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등교하기 위해 올라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 할아버지를 마주한 순간에도 그 안에 온기는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몇 층에 사는지 잘 몰랐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인사하기가 쭈뼛했다. 할아버지도 모르는 고등학생에게 먼저 인사 건네기 어려운 오늘날인 듯했다. 그 순간 때문인지 학교로 향하는 등굣길이 유독 더 춥게 느껴졌다. 하지만 학교 정문에 다다르자 등굣길에 했던 내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평소와 같이 학교 정문에 우뚝 서 있던 시계를 쳐다보던 중 누군가 그 옆에서 열심히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는 걸 발견했다. 회색과 검은색이 적절히 섞인 제복을 보고 새로 오신 경비아저씨라는 걸 알아챘다. 경비아저씨는 등교하는 학생 중 한 명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몸짓으로 인사해주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경비아저씨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서서히 많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본 경비아저씨의 하루는 등교 시간, 점심시간, 그리고 귀가하는 시간으로 나뉘었다. 경비 아저씨 덕분에 아침 등교 시간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아침밥을 거르던 나에게 경비 아저씨의 인사말은 어떤 음식보다 포만감 있고 따뜻했다. 눈꺼풀 위에 아파트 세 채 정도 올려둔 것처럼 피곤해하며 등교할 때도 경비아저씨는 화사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매일 새벽 같은 느낌의 아침을 맞았다면, 경비아저씨를 만난 후 점차 진짜 아침을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비아저씨는 학생들에게 항상 모범이 되어주셨다. 고등학교 3학년에게 유일한 낙이었던 점심시간에, 경비아저씨는 점심을 먹으며 책을 보고 계셨다. 나와 친구는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주 매점에 갔었는데, 그때마다 보았던 점심의 풍경이었다. 경비 아저씨는 그늘진 오후를 맞이할 땐 소설책을 읽으셨고 해가 떠나가지 않는 오후의 날에는 단어 책을 쥐고 계셨다. 그럴 때면 친구와 나는 점심을 먹고 난 뒤, 교실에 앉아 책을 펴기 시작했다. 쌀쌀한 점심에는 쇼코의 미소를, 해가 쨍쨍한 점심에는 수능 1000단어 책을 보았다. 경비아저씨가 은유해주시던 점심을 온전히 느낀 날이었다.

 

경비아저씨의 은유는 집으로 귀가할 때도 나에게 강렬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나의 상담 시간을 뒤로 미루었던 날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나는 자꾸만 뒤로 밀리던 학생이었고 상담 시간마저 뒤로 밀리니 더는 밀려날 곳도 없다고 느꼈던 그 날. 나는 누가 봐도 낙담한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때 경비아저씨가 내 오른쪽 손바닥 위에 점심으로 나왔던 연시를 올려주셨다. 언제 내 이름을 알게 되셨는지 모르겠지만, 경비아저씨는 나의 이름도 불러주시며 웃으셨다. 

 

 



나는 연시처럼 물컹한 무언가가 속에서 올라오는 걸 느꼈다. 나는 연시가 터지지 않게 오른손으로 살짝 쥔 채 천천히 교문을 나섰다. 사람들도, 심지어 길고양이들도 잘 보이지 않는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연시만이 버스를 기다렸지만 어쩐지 외롭지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이 신호에 걸린 초록색 버스가 더 진한 초록색 같아 보였다. 나는 초록 버스에 앉아가는 내내, 연시가 혹시라도 터질까 손이 저릴 정도로 가만히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입고 있던 롱패딩 주머니에 연시를 넣었다. 연시가 터지지 않게 천천히 걸으며 집으로 가야 했다. 평소대로라면 5분 안에 집에 도착할 텐데 15분 정도를 걸었다. 겨울옷을 입은 나무들,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던 사람들, 놀이터 모래 위를 걷던 회색 고양이. 주머니 속의 연시가 여유를 알려주던 순간이었다. 금방 위층으로 떠날 것 같은 엘리베이터도 굳이 잡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힐 때쯤 얼마 전에 마주쳤던 이웃 할아버지가 헐레벌떡 들어오셨다. 나와 살짝 부딪혔기 때문에 나는 주머니 속 연시를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연약해서 터져버렸을 줄 알았는데 연시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나는 연시를 주머니에서 꺼내며 할아버지께 처음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안녕” 

 

할아버지는 평소 무표정이었을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미소를 지으셨다. 경비아저씨는 자신만의 은유로 나와 할아버지께 따뜻한 순간을 선물해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