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에세이

또 하나의 가정

 

‘참사람 에세이’는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113번째 편지 

또 하나의 가정

 

글 : 김예진(참사람 독자)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제게 가족의 의미와 그 따스함을 가르쳐주신 꿈이 자라는 지역 아동센터의 김 원장님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김 원장님과 처음 만난 것은 22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원장님께서 운영하시는 지역 아동센터에서 교육 봉사자로 활동했었습니다. 부끄럽게도, 봉사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투철한 봉사 정신이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범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저는 교직 이수를 위한 요건을 충족시키려 봉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봉사를 시작한 지 한 달쯤 됐을 무렵, 저는 아동 센터의 '문틈 사이'로 따뜻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가족의 의미와 봉사의 따스함을 느꼈던 그 날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문틈 사이의 저는 어떤 풍경을 목격했을까요? 그날의 이야기를 먼저 풀어보고 싶습니다.

 

저녁마다 15살 여중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던 저는 봉사가 끝난 늦은 저녁에 원장님과 여자 중학생 세 명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문을 닫은 뒤, 급작스럽게 원장님께 드릴 말씀이 생각나 문을 조심스레 다시 열었습니다.

 

10cm쯤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원장님의 음성을 듣고 더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김 원장님께서는 안에 있던 여학생들을 부르며 은비야, 수민아(가명) 생리대 필요하지? 이리 와서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사춘기 여학생의 마음을 배려하기 위해서 제가 나간 후 원장님과 아이들만 있을 때를 기다리셨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살며시 문을 닫고 집으로 나섰습니다.

집으로 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의 여중생에게는 생리대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에게 직접적이고 필수적인 지원과 도움을 주는 장소를 여태껏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아동 센터의 면면을 자세히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차분히 관찰한 아동 센터는 지역 사회 어린이들의 난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배를 곯는 아이들은 그곳에 와서 밥과 간식을 먹을 수 있고,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친구들은 대학생 봉사자들로부터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 원장님께서는 그곳의 중심에서 늘 웃으면서 친절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따뜻한 말과 마음을 건네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집 같기도 하고, 공부방 같기도 한 따뜻한 그곳의 기운을 느끼며 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김광미 원장님께서는 품도 많이 들고 수많은 지원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이곳을 어떤 이유로 운영하기로 결정하셨을까요?

 

봉사가 끝난 늦은 저녁, 저는 김 원장님과 센터에 둘만 남아 오붓이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여쭤볼 수 있었습니다. 왜 이 아동 센터를 운영하시기로 결심하셨냐는 질문을 가장 먼저 드렸고, 김광미 원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정동이나 가좌동을 걷다가 보면, 혼자서 길에 나와 방황하는 아이들을 가끔 볼 수 있었어. 하나같이 마르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아이들이 많았지.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머무를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정'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갈 곳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들렀다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집 같은 거 말이야."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김광미 원장님의 눈빛은 따스하고 깊어 보였습니다.

 

저는 '또 하나의 가정'이라는 원장님의 말씀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가정은 태어날 때 정해진 단 하나의 가족 구성원을 뜻합니다. 이렇게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가족과 가정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보물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나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원장님은 후자의 가정에 사는 어린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니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많은 사비를 들여야 하고 시의 재정 지원 역시 충분치 않지만, 아동 센터를 설립한 뒤에 훨씬 더 행복해지셨다고 말씀하시는 원장님의 푸근한 얼굴이 여전히 또렷이 기억납니다.

 

혹자는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김 원장님과 만난 이후로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과거엔 안정된 수입과 적절한 소비를 행복의 기준이라고 믿었다면이제는 베푸는 삶이 주는 풍족한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리고 약한 것들을 지키며 사는 삶은 돈과는 무관하게 그 너머의 또 다른 행복을 안겨준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김 원장님처럼 누군가에게 넉넉한 가정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저와 사회를 조금은 더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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