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에세이

따끈한 옥수수 알에서 묻어나는 사제지정

 

‘참사람 에세이’는 가족, 이웃, 친구, 스승, 우연히 스친 이름 모를 인연 등 지난 시절 내가 만났던 참사람의 따스한 기억을 길어 올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창구입니다. 매주 웹진 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람 에세이 115번째 편지 

따끈한 옥수수 알에서 묻어나는 사제지정

 

글 : 김덕준(참사람 독자)

 

 

긴 공직을 마감하고 야인이 된 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 재직하는 동안 많은 사람을 접했지만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얼굴들이 있기에 이제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십여 년 전이다. 시내 모처에서 연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내 옆에는 초등학교 A교장이 계셨다. 우리는 3일간 함께 연수를 받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연수 마지막 날 A교장이 내가 북부교육지원청에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고 혹시 김00 교장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안면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이 김 교장 선생님의 제자라면서 은사 얘기를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그 감동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의 은사인 김 교장은 서울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강원도 모처의 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이후 몇 년 뒤 그는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이듬해 그는 서울로 유학 온 제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얘기 끝에 자신이 담임했던 몇몇 제자의 안부를 물었다. 그 제자 중의 한 명이 내가 만났던 A교장이다. 그는 제자인 A교장이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교진학을 하지 못하고 부모님과 농사일을 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많은 생각 끝에 김병국 교장은 제자인 A교장(이하 제자)에게 시간이 나면 서울로 한번 올라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렇게 해서 제자는 가을 추수를 끝내고 상경하여 옛 담임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김 교장은 여동생과 달동네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상경한 제자는 스승 남매와 함께 좁은 단칸방에서 세 명이 먹고 자면서 동고동락했다. 스승의 누이는 제자인 A교장보다 서너 살 많다 보니 그는 누나로 대했고, 이들 또한 끈끈한 남매의 정을 쌓았다고 했다. 스승의 적극적인 보살핌으로 제자는 이듬해 유한공고에 입학했다. 그는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가 너무 공부를 잘하고 성실하기에 고교 졸업 후 바로 직업전선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많은 고민 끝에 스승은 우선 합격하면 병역이 면제되고 학비가 저렴한 서울교육대학 입학원서를 갖고 와서 제자와 상의를 했다. 제자는 스승의 뜻에 따라 교대에 합격하고 졸업 후 스승과 제자는 서울 하늘 아래서 함께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동안 제자의 부모는 아들의 옛 담임이 아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까지 시켜주는 은혜에 너무 죄송해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들 부모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매년 시골에서 수확한 옥수수를 대접하는 것 말고는 달리 없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은사에게 올리는 보은의 옥수수 선물은 수십 년째 이어지게 되었다.

 

 

A교장은 매년 고향에서 올라온 옥수수를 큰 솥에 삶아서 곧바로 은사인 김 교장 선생님이 계시는 학교로 직접 보내 전 교직원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먹게 했다. 교직에 입문한 제자는 교사와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되었다. 스승의 은혜에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있던 그는 보은의 방법으로 모 방송국에서 주관하는 참된 스승 찾기 프로그램에 지원해 은사를 소개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은사인 김 교장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차분하게 스승 얘기를 하시던 A교장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들 사제의 애틋한 정은 그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져 자식들도 친형제처럼 끈끈한 우애를 이어간다고 했다.

 

내가 김 교장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시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장 선생님은 광남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했다. 이후 교장 선생님은 내가 근무하고 있는 교육지원청 관내 중계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중계중학교에는 겨우 손가락과 목만 움직일 수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학생은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고, 지난 2년 동안 학생의 어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휠체어를 밀어 딸을 등교시켰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본 교장 선생님은 장애 학생을 위해 승강기를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청과 관계기관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소수의 특혜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우리 교육지원청에서도 지원에 나섰다. 당시 지역 언론에서도 민주주의는 다수를 위한 제도이지만 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또한 중요한 가치라며 교장 선생님의 노력에 찬사를 보냈다. 김 교장 선생님은 A교장 말고도 재직하는 동안 여러 어려운 제자들을 보살폈다. 심지어 신혼 때에도 오갈 데 없는 제자를 데려와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이 뒷날 제자를 통해 알려졌다.

 

나는 가끔 따끈한 김이 솟구치는 옥수수를 대할 때면 두 교장 선생님의 애틋한 사제지정이 아름다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역시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으로 고교 입학 후 1년이 안 되어 정든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객지를 전전할 때 꿈과 용기를 잃지 말라는 은사님의 편지는 당시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짠한 표정으로 은사 얘기를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시던 A교장 선생님과 어려움에 부닥친 제자를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 안은 김 교장 선생님의 후덕한 인상이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두 교장 선생님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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